ㆍ빈곤탈출·실업구제… 나라를 바꾼 ‘그들의 선택’투표장에서 유권자가 행사한 표는 결국 다시 유권자에게 돌아온다. 인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브라질의 유권자들은 7년 전 ‘급진적’이라고 평가받던 룰라 대통령에게 표를 던져 새로운 도약을 준비했다. 스웨덴 유권자들은 70여년 전에 일찌감치 자신들이 나아갈 방향을 ‘복지국가’로 선택했다. 미국 국민들은 루스벨트를 선택함으로써 전대미문의 대공황을 이겨냈다. ‘순간의 선택’이 삶의 행로를 가른 것이다.
# 룰라, 브라질을 변화시키다브라질 국민들은 2002년 가을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대권 4수생’ 루이스 이냐시오 룰라 다 실바를 선택했다. 살인적인 물가와 경기침체, 빈곤에 시달리던 브라질 국민들은 노동자 출신의 룰라를 통해 변화를 꿈꿨다.
룰라 집권 전 브라질은 암울했다. 룰라의 전임자인 사회민주당의 페르난도 카르도수는 8년간 집권하면서도 브라질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미국 달러와 1 대 1로 하는 고정환율제를 통해 인플레이션을 막고 외자를 끌어들인다는 ‘헤알 플랜’을 통해 잠시 성공하는가 싶었으나 곧 부작용이 나타났다. 수입 급증에 따른 무역적자 확대가 나타났고 이 때문에 외자를 더 끌어들이려 이자율을 올리는 악순환이 시작됐다.
카르도수는 종속이론을 주창한 대표적인 학자였다. 국제사회학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94년과 98년 대선에서는 연거푸 룰라를 꺾고 브라질 민주주의 역사상 처음으로 재선에 성공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그러나 카르도수도 브라질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이에 브라질 국민들은 2002년 대선에서 더 ‘확실한’ 변화를 위해 ‘좌파’ 룰라를 선택했다.
브라질 국민들의 열망은 61.3%란 사상 최대 득표율로 나타났다. 노동자당(PT)의 룰라는 대선 레이스에서 기존의 이미지였던 급진주의 대신 중도좌파의 길을 택했다. 극우파를 제외한 모든 세력과 손을 잡았다.
룰라는 먼저 ‘외채를 모두 상환하겠다’고 선언했다. 세계경제를 안심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또 긴축재정으로 재정흑자율을 올렸고, 이자율을 상향조정해 자본 유출을 차단했다. 미국과의 경제협력을 이어가는 대신 대미 수출의존도는 낮췄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 브릭스(BRICs), 멀리는 아프리카 국가와의 협력을 강화했다. 이를 통해 국제사회의 신뢰는 회복됐다.
2002년 브라질의 실업률은 20%에 달했다. 국민 10명 중 2명은 직업을 구하지 못했다. 또 인구 1억9000만여명 중 40%는 빈곤층이었다. 이들의 빈곤은 이후로도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
룰라 이후 브라질 경제는 극적 반전을 시작했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연평균 5%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2002년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던 브라질은 2008년 순채권국이 됐다. 물론 원자재에 대한 국제수요가 급증하는 등 외부 호재가 크게 작용했지만, 브라질의 변신 뒤에는 대통령 룰라가 있었다.
룰라는 브라질의 대외적 위상을 재정비하는 동시에, 내부적으로 쌓여있던 숙제도 해결해 나갔다. 가장 먼저 빈곤층 구제에 들어갔다. 구제사업에 들어갈 재원 마련을 위해 공무원 연금제도를 개혁했다. 룰라 이전의 어느 정부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영구적인 빈곤 탈출을 위해 소득지원제도를 기존의 것보다 구체화시켰다. 정부의 소득지원제도 혜택을 받는 국민은 350만명에서 1100만명으로 증가했다. 물론 지니계수(소득의 분배 균등을 나타내는 수치)가 개선됐다.
‘급진주의’의 이미지를 갖고 있던 룰라는 시장을 버리지 않았다. 대신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을 택했다. 또 미국 주도의 세계화를 인정하되 개도국의 목소리를 키우는 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4년 뒤 열린 2006년 대통령 선거에서 브라질 국민들은 다시 룰라를 선택했다. 1기 집권 중에 행정부 내에서 심각한 부패 스캔들이 터졌지만 국민들은 룰라를 믿었다.
고전끝에 재신임을 받은 룰라는 2007년 성장촉진계획을 발표했다. 국제 원자재 수요에 대한 의존성을 줄이기 위해 대규모 인프라 투자계획을 통해 내수를 진작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또 2008년 하반기에는 은행국유화법안을 통과시켰고, 사회복지정책에 대한 투자도 확대하기로 했다. 또 올해부터 15년간 서민주택 1200만호를 건설하기로 했다.
현재 룰라의 지지도는 80%를 넘나든다. 브라질 정치 역사상 최고다. 3선 대통령도 가능한 분위기다. 브라질 유권자의 절반가량이 “다음 대선에서는 ‘룰라가 지명한 후계자’를 뽑겠다”고 답변했다는 여론조사도 있었다. 남미 전문가인 박정훈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위원은 “룰라는 민주주의가 민중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 스웨덴, 다른 삶을 택하다 ‘복지국가’의 상징으로 불리는 스웨덴 국민들은 일찌감치 ‘좌파’를 선택했다. 그리고 70여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선택은 ‘비교적’ 옳았다. 스웨덴의 사회민주당은 1920년대에 이미 35%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사민당은 32년 총선에서 42%를 득표한 뒤 또다른 ‘좌파’인 농민당과 연합해 연정을 꾸렸다. 역사적인 스웨덴 사민주의의 시작이었다.
사민당의 첫번째 과제는 대공황으로 인한 대량실업과 빈곤 문제 해결이었다. 사민당은 ‘복지를 통한 불황 극복’을 선택했다. 34년 스웨덴은 실업보험을 도입했다. 관리는 노동조합이 맡았다. 노조가 운영하던 실업구제제도에 국가가 재정을 보조하는 형태였다. 이로 인해 노조의 힘은 더욱 강화됐다.
사민당 정부는 여기에 더해 노령연금 급여액을 상향조정하고, 임산부보험을 도입했다. 이에 필요한 재정은 누진세를 통해 조달했다. 가족수당제도도 생겼다. 빈부 격차로 인해 발생되는 교육불평등을 제거하기 위한 조치였다. 사민당 정부는 사회복지정책을 통해 사회적 자원을 공정하고 적절하게 재분배한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이 원칙은 노조와 농민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70년대 이전까지 사민당은 공공부문 확대를 통한 사회복지정책을 추구했다. 복지정책은 여성들을 노동시장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아동보호정책 덕분에 자녀가 있는 여성들도 경제활동에 활발하게 참가할 수 있었다. 낮시간 동안 아이들을 맡길 수 있는 유치원이 60년대 5만여개에서 70년에는 15만8000개, 80년에는 40만7000개로 늘어났다. 스웨덴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유럽 최고 수준이 됐다.
20년대까지만 해도 스웨덴은 유럽 변방의 후진 농업국에 불과했다. 그러나 ‘국민의 가정’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사민당이 집권한 이후 스웨덴은 전 세계에서 ‘행복지수’가 아주 높은 국가 중 한 곳이 되었다. 사민당은 2006년 우파연합에 패배해 정권을 내주었다. 그러나 스웨덴의 ‘복지국가’ 위상은 굳건하다. 국민 절대다수는 여전히 복지국가의 유지를 찬성하고 있다. 어느 누가 집권하더라도 복지국가의 기반은 흔들리지 않는다. 좌파가 구축한 복지국가의 혜택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 루스벨트, 시장을 배반하다32년 미국의 경제상황은 최악이었다. 대공황이 전 세계를 강타하던 시점이었다. 32년 미국의 국민총생산(GNP)은 3년 전인 29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고 실업자는 1300만명에 이르렀다.
당시 대통령은 공화당의 허버트 후버였다. 후버는 성공한 기업가이자 경험있는 관료 출신이었다. 그러나 후버가 집권한 29년부터 대공황이 시작됐다. 그가 취임 연설때 한 ‘우리는 역사상 어느 때보다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다. 우리는 만연했던 빈곤으로부터 해방되어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는 말은 순식간에 허언이 됐다.
대공황을 겪으면서도 후버의 정책은 낙관적인 경제전망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호황과 불황이 교차하는 것은 당연하며, 불황은 시간이 지나면 극복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미국 국민들은 대공황으로 생긴 판자촌을 ‘후버빌’, 노숙자들이 덮는 신문지를 ‘후버 담요’라고 비꼬아 말했다.
미국 국민들은 이제 ‘다른 선택’을 했다. 32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뉴딜 정책’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미국 유권자들은 ‘새로운 정책’을 앞세운 민주당의 손을 들어줬다. 루스벨트는 33년 3월 특별의회를 소집한 뒤 6월16일까지 100일 동안 ‘백일의회’라고 불리는 특별회기 내에 적극적인 불황대책을 통과시켰다. 이른바 ‘뉴딜 법안’의 제정은 진보적인 전문가 그룹인 ‘브레인 트러스트’가 주도했다.
뉴딜정책을 위해 제안된 법안은 그동안의 ‘자유시장경제’를 배반하는 것이었다. 시장을 신뢰하는 대신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정부 재정을 통해 ‘구멍’을 메우는 대신 강력한 규제책도 동원했다. 우선 긴급은행법을 제정했다. 회생 가능성이 있는 은행에는 대폭적인 대출을 해줘서 정상화시켰다. 이어서 금본위제를 폐지하고 관리통화법을 도입했다. 통화에 대한 정부의 규제력은 강화됐다.
농업 구제를 위해 농업조정법도 제정했다. 주요 농산물의 생산을 제한해 균형가격을 회복시켰다. 재정난에 빠진 농민들에게는 자금을 원조했다. 그 결과 농산물 가격은 상승했고 농가소득은 3년 동안 50% 이상 증가했다. 덕분에 농촌에도 경제적 안정이 생겼다.
산업부흥법을 통해 농업이 아닌 다른 산업에도 적극적으로 정부가 끼어들었다. 산업부문마다 공정경쟁규약을 만들어 지나친 경쟁을 억제시켰다. 생산제한·가격협정이 가장 큰 수단이었다. 이와 함께 노동자의 단결권·단체교섭권을 인정하는 동시에 최저임금과 최고노동시간의 규정을 약속했다. 노동자의 고용과 임금이 확보되면서 자연스럽게 노동시장도 안정됐다. 대표적인 ‘뉴딜사업’인 토목공사를 위해 테네시강 유역 개발공사도 설립됐다.
루스벨트는 뉴딜정책을 통해 단기간에 공황을 극복해냈다. 국민들은 적극적으로 뉴딜정책에 대해 관심을 갖고 참여했다. 뉴딜정책을 통해 국민들은 정부와 정치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달았다.
뉴딜정책의 여러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는 36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승리했다. 유권자 60%의 지지를 얻었으며 메인주, 버몬트주를 제외한 모든 주를 석권했다. 지지도를 확인한 루스벨트는 “부유한 사람들을 더욱 부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풍요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보의 기준”이라며 정책의 방향을 분명히 했다.
뉴딜정책을 통해 미국의 전통적인 자유시장경제(자유방임주의)는 수정됐다. 정부에 의한 시장통제가 시행됐으며 케인스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7년에 걸친 뉴딜정책은 이후 미국 정치·사회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홍진수기자 soo43@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