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주의 운동의 주창자 앙드레 브르통이 멕시코에 왔을 때의 이야기다. 브르통은 자신이 펼치는 초현실주의 운동의 잠재적 동지들(프리다 깔로에서 레온 트로츠키까지)을 만나러 멕시코에 왔다가 어느 술집에서 왁자지껄 잔치를 벌이고 있는 한 무리의 멕시코 농민들을 목격했다.
세상에서 가장 초현실주의적인 국가
술집에서 농부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친형제들처럼 소리 높여 웃고 떠들고 건배를 외치며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금세 세상에 둘도 없는 철천지 원수들처럼 서로 치고 박고 드잡이질을 벌였고 그 와중에 한 치가 맥없이 축 늘어져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한 친구가 죽게 되자 농부들은 언제 다투기라도 했냐는 듯이 동작을 멈추고 상부상조의 품앗이 정신을 발휘해 숨이 멎은 동료의 사지를 사이좋게 나눠들고 술집 밖으로 일제히 나가더니 세상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장례식을 마치고 가장 빠른 속도로 삶의 원기를 회복한 사람들이라도 된 양 선술집으로 다시 돌아와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시끌벅적한 파티를 계속 이어갔다.
그 일에 깊은 인상을 받은 브르통은 훗날 자신이 기초한 초현실주의 이론의 민족적 기반을 발견했다고 소리쳤다. “멕시코는 세상에서 가장 초현실주의적인 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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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코요아칸의 프리다, ca.1927, 종이에 수채화, 16x21cm |
브르통, 프리다, 마르께스
한편 브르통이 잠재적 동지라고 굳게 믿었던 화가 프리다 깔로가 ‘초현실주의자’라는 이름을 거부했을 때 그는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브르통이 ‘세상에서 빠른 장례식’과 같은 사건들에 아주 익숙한 프리다에게 동지애를 과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프리다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당신 그림도 그 장례식만큼이나 초현실적이야”
나는 초현실주의 이론가 브르통과 초현실주의적 삶을 영위하고 있는 멕시코농민들 사이의 국적과 계급을 뛰어넘는 ‘초현실주의적 연대’에 대한 이야기를 멕시코에 체류하고 있을 때 어느 멕시코 시인에게서 들었다.
환상도 삶의 명백한 일부라는 것을 알려준 초현실주의 운동 이후에 태어난 우리가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허구인지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다만 여기서 프리다 깔로가 왜 초현실주의자라는 브르통의 견해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는 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두 관점의 차이는 사실은 술집의 멕시코 농민과 이방인의 거리, ,멕시코 화가와 유럽 평론가의 거리 즉 라틴아메리카와 유럽의 거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라틴아메리카는 늘 외부의 눈에 의해 규정되고 정의되었다. 그것이 가르시아 마르께스가 걸작 [백년의 고독]에서 다루고자 했던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이라는 테마였다. 남의 눈으로 자기를 들여다보기 때문에 더욱 자유롭지 못하고 더욱 고독하게 되는 것이라고 마르께스는 주장했다.
프리다는 보이지 않는 자신의 고통과 환상을 보이게 만들었다. 유럽의 호사가들은 그 그림을 초현실주의적이라며 환호했다. 프리다가 자신의 고통과 환상이 초현실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과연 수용할 수 있었을까. 마르께스는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삶을 실제로 지배하거나 지배하려드는 비가시적인 것들을 소설 속에 등장시켰다. 외부인들은 그를 마술적 리얼리스트라 부르며 환장했다. 마르께스 자신이 중남미 민중의 실상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들이 이방인의 눈에는 환상적이고 마술적이라니. 그래서 마르께스는 한사코 마술적인 것은 자신의 소설이 아니라 중남미의 현실 그 자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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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나르바에스, 원주민 여인, ca.1937, 캔버스에 유채, 53.4x43.7cm |
라틴아메리카의 눈
덕수궁 미술관의 ‘20세기 라틴아메리카 거장전’에 갔다가 ‘브르통과 멕시코 농부’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린 것은 유럽산 이념으로 중남미 현실을 들여다보는 것만큼이나 유럽산 미학으로 라틴아메리카 예술을 규정하는 것이 함정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기위해서였다. 게다가 20세기 내내 라틴아메리카 예술가들은 그런 시각에 맞서 싸워왔기 때문이다.
라틴아메리카 예술가들이 자신의 눈을 찾아야 한다고 자각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이베리아 반도의 식민주의자들이 대륙을 정복하고 통치하던 300여 년 동안 이 대륙의 예술가들은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눈을 갖고 있었다. 19세기 벽두 이 대륙에 독립전쟁의 불길이 타올라 새로운 지배계급(식민지에서 태어난 유럽인의 후손들)이 탄생했지만 그들은 당시 선진국으로 이름 높았던 프랑스와 영국의 눈을 선망했다.
이 대륙의 예술가들이 스스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고유한 눈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1910년 멕시코에서 전직이 사탕수수 농부와 산적이었던 두 명의 사령관들이 농민과 노동자를 무장시켜 혁명을 성공시키면서였다. 멕시코 혁명은 라틴아메리카 예술가들에게 사회혁명에 대한 강렬한 연대의식을 불러일으켰고 혁명의 미학적 성취였던 벽화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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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 리베라, 피놀레 파는 여인, 1924, 캔버스에 납화, 81.5 x 60.5 cm |
‘20세기 라틴아메리카 거장전’에 초대된 작품들의 생산연대는 1920~1970년대로서 멕시코 혁명이 고양시킨 민족의식(라틴아메리카적 정체성)이 도처에서 발흥하던 격정의 시대였으며 경제적으론 지금도 그 시절을 흉내 낼 수조차 없을 속도로 성장하던 시대이기도 했다. 예술가들도 뭇 선언들을 쏟아내어 그룹을 결성하고 기념비적인 작품을 생산해내던 시대였다.
벽화운동의 메아리
지난 2002년, 그러니까 21세기 초에 나는 멕시코 동남부의 한 원주민 마을에서 약 100년 전에 발흥한 벽화운동의 유산을 보았다.
지금은 뉴욕 월가에서 묵직한 굉음을 내고 신자유주의란 놈이 비실비실 쓰러지고 있지만 불과 10년 전만 해도 그 놈은 유령처럼 라틴아메리카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때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은 원주민들에게서 토지를 빼앗고 공동체를 파괴하면 더 이상 멕시코에 살 수 없으니 미국에서 살 수 밖에 없을 것을 예언하며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사빠띠스따들의 예언은 너무도 적중한 나머지 사빠띠스따 게릴라 출신 원주민조차도 먹고 살기 위해 무기를 놓고 리오 그란데 강을 건너 미국을 향하게 만들었지만.
내가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의 사령부 마을에 방문했을 때였다. 원주민들이 손수 나무로 엮어 만든 강당 외벽에서 스키마스크를 쓴 채 기관총을 어깨에 메고 오버헤드킥을 하는 게릴라 전사의 벽화를 보았다. 그 벽화 아래엔 “축구로 해방을 향하여!”라는 자못 선동적인 구호가 적혀 있었다. 신자유주의가 마야족 원주민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아 가긴 했지만 축구공과 벽화는 끝내 빼앗지 못한 것이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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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죽음과 부활, ca.1943, 메조나이트에 템페라, 96.8x122cm |
라틴아메리카인처럼
2000년부터 6년 6개월 동안 멕시코시티에 체류하면서 라틴아메리카 10개국을 방문했지만 ‘20세기 라틴아메리카 거장전’에 전시된 작품 가운데 4분의 1도 현지에서 직접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는 페루의 오일장에서 ‘옥수수 가루(삐놀레)를 파는 아낙’을 보았고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5월 1일 행진’을 진압하는 경찰들을 목도했으며 베네수엘라에선 차베스라 불리는 ‘선동정치가’가 연설하는 광경도 지켜보았다. 멕시코의 한 원주민 마을의 장례식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읊조리는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지금도 콜롬비아에 가면 ‘죽은 아이’를 들고 일어서는 대신에 아이들을 그저 넙죽 넙죽 받아먹기만 하는 대지의 신 빠차마마를 볼 수 있다.
주말에 멕시코시티 광장에 나가면 ‘산 안또니오 데 오리엔떼 풍경’의 스타일을 완전히 베낀 멕시코 무명화가들의 작품을 수없이 감상할 수 있으며 볼리비아의 고산 도시에서는 ‘원주민 여인’들이 코카 잎을 씹으며 아기를 들쳐 업듯이 짐을 들쳐 업고 하염없이 걷는 풍경과 만날 수 있다. 원주민과 흑인이 다수 거주하는 마을에 가면 으레 보게 될 민예품의 다채로운 무늬들이 열대지역의 ‘쾌적한 여름’ 아래 펼쳐져 있다.
‘초현실주의자’ 마리아 이스끼에르도의 ‘아담과 이브’를 멕시코 인들이 보았다면 자신의 집에 있을 민예품 ‘생명의 나무’를 떠올렸을 것이며, ‘구성주의자’ 호아낀 또레스 가르시아의 ‘구조’를 페루사람들이 봤다면 자신의 선조들 잉카인들이 쿠스코에 세운 건물의 아랫도리 구조가 생각난다고 말했을 것이다.
덕수궁에서 나는 마치 라틴아메리카 사람이라도 된 양 그림들을 감상하며 그 그림들에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들이 무엇인지 상상하는 즐거움에 흠뻑 빠졌다. 한국에 수년간 체류한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한 브라질 사람이 상파울루에서 열리는 ‘한국의 거장전’이라는 전시회에 들러 한국인이라도 된 것처럼 반가워하듯이.
물론 캔버스에 붓을 대기보다는 칼을 대는 것을 더욱 즐겨했던 ‘공간주의자’ 루시오 폰따나는 ‘캔버스’ 공간을 탐구하느라 너무 분주한 나머지 자신이 이탈리아에 있는지 아르헨티나에 있는지 별로 개의치 않았고 나조차 그의 작품이 어디에서 제작되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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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아킨 토르레스-가르시아, 구조, 1935, 판지에 유채, 52.8x43cm |
루시오와 백남준
루시오와 관련해서는 한 지인의 인상평을 소개하고 싶다. 그는 덕수궁 전시회를 둘러본 뒤 라틴아메리카 현대 작가들의 경우는 서양 미술의 아류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혹은 멕시코시티에서 ‘아시아 거장전’이 열리고 그곳에 백남준의 작품이 몇 점 초대되어 전시되었다고 상상해보자. 그 전시회를 관람한 라틴아메리카 사람 하나가 백남준의 작품을 감상한 뒤에 아시아의 현대 비디오 아트는 서양 예술의 아류라고 혹평한다면?
루시오가 이탈리아인(유럽인)일 때 그는 서양미술의 선두주자가 되고 세계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작가가 되지만 루시오가 아르헨티나 사람(라틴아메리카인)일 때 그는 서양예술의 아류가 된다. 백남준이 미국인일 때 그는 현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가 되어 세계미술사에 획기적인 족적을 남긴 이가 되지만 백남준이 한국인일 때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라틴아메리카 사람에겐 한갓 서양 미술의 아류로 둔갑하듯이.
여기서 우리는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문제로 돌아가 보자. 나는 라틴아메리카 예술가들이 자기의 고유한 눈(그것이 세상을 보는 눈이든 캔버스를 보는 눈이든)을 갖기 위해 노력했다고 지적했다. 이제 거기에 한 가지 사실을 더 추가해야겠다. 중남미 예술가들의 눈을 통해 대륙 바깥의 많은 이들이 라틴아메리카를 들여다보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들 스스로를 새롭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점을 말해야겠다.
멕시코 벽화운동이 한국 민중미술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중남미 예술가들의 눈은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세계와 자기 자신을 보는 눈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래서 이들은 라틴아메리카의 거장이면서 한국인들이 존경하는 예술가들이기도 하다. 즉 진정한 세계적인 거장들이라 할 만하다. 디에고 리베라, 프리다 깔로, 루피노 따마요, 위프레도 람, 페르난도 보떼로, 루시오 폰따나.......
박정훈 - 1972년 출생. 2000년 5월에서 2007년 8월까지 멕시코시티에 머물며 한국에서 유일한 라틴아메리카 전문 르포 기자로 활동하면서 라틴아메리카 10개국을 방문하고 《한겨레21》,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한국판), 〈오마이뉴스〉, 〈프레시안〉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 기고하였다.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이 멕시코시티를 방문했을 때 세 명의 원주민 사령관을 특종 인터뷰했으며, 브라질의 룰라 정부의 탄생 소식을 상파울루 현지에서 타전하였고,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정치적 우여곡절을 겪을 때마다 카라카스 현지를 방문해 취재하였다. 옮긴 책으로 《마르코스》, 《게릴라의 전설을 넘어》(책임번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