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진보엔 왜 ‘쓸만한’ 싱크탱크 없을까 미국 대선의 승자가 되길 원하는 사람은 각 정당의 대선후보들만이 아니다. 후보들 못지않은 열기로 무대 아래에서 정책 경쟁을 벌이는 이들이 있다. 워싱턴DC에 밀집해 있는 싱크탱크(두뇌집단) 얘기다.
이들의 목표는 대선이 끝난 후 자신들의 연구 결과가 현실 정치에 최대한 반영되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서 승리하는 싱크탱크는 차기 정권에서 정책 주도권을 쥘 수 있다. 세계적 명성의 ‘브루킹스 연구소’도 대선에 적극 개입하고 있는 두뇌집단 중 하나다. 자유주의 성향의 이 연구소는 ‘기회 08’(www.opportunity08.org)이라는 이름의 초대형 프로젝트를 가동, 외교·국방·경제·환경 등 다양한 주제의 정책 보고서를 쏟아내고 있다. 정책 선거의 풍토 자체가 확고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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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싱크탱크 ‘희망제작소’의 박원순 상임이사와 연구원들이 희망제작소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물론 한국에도 각종 정책 연구소가 있다. 정부 출연 연구소는 20곳이 넘고 대기업이 세운 연구소의 영향력도 막강하다. 문제는 이런 주류 연구소들이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는 진보·개혁적 연구소의 기반이 허약하다는 데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친정부·친기업적인 정책 보고서가 주종을 이루는 게 현실이다. 진보·개혁적인 목소리는 정책 대안을 내놓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논평이나 성명을 쓰는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변화의 조짐을 찾는다면, 최근 들어 몇몇 산별노조들이 부설 연구소를 열었거나, 출범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보·개혁 세력이 정책 대안을 전략적·제도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공론장을 만드는 데 첫발을 내디뎠다는 평가다.
돈도 없고 인력도 없다
전 세계 싱크탱크 중에서 언론에 인용되는 빈도로 따지자면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와 ‘헤리티지 재단’을 따라올 곳이 드물 것이다. 1916년 전신인 ‘정부조사연구소’로 출발한 브루킹스는 역대 민주당 정권과 정책적 협력관계를 맺으며 성장해왔다. 그러나 연구소의 이름으로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일은 없다. 연구 결과의 품격과 신뢰를 담보하기 위해 독립성을 최우선 가치로 삼기 때문이다. 현재 200명이 넘는 전임 연구원들이 정책 보고서를 만들고 있다.
비당파성과 규모를 자랑하기는 헤리티지도 마찬가지다. 헤리티지는 보수주의자들이 자유주의 세력에 대항할 지적 토대를 다지기 위해 73년 설립한 두뇌집단이다. 공화당과 같은 노선을 추구하지만 공화당의 후원금은 받지 않는다. 200명 이상의 연구진들이 정부 정책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삼고 보수적 담론을 생산하고 있다.
한국에서 헤리티지와 성향이 비슷한 곳을 들라면 기업 연계 연구소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와 LG경제연구원, 현대경제연구원 등 대기업이 세운 연구소는 시장주의를 표방하며 친기업적 보고서를 부단히 발표하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등 국책 연구소도 재원이 정부에서 나오기 때문에 주류 이론을 뒤엎는 대안을 제시하기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브루킹스에 비견할 만한 싱크탱크로는 어떤 곳이 있을까. 추구하는 방향성만 보면 브루킹스보다 더 개혁적인 곳들이 분명 있다. 하지만 인적·물적 규모 면에서 이들 연구소는 기업 연구소나 국책 연구소를 따라가기 힘들다. 보수적 연구소들과 공정하게 겨룰 수 있는 조건 자체가 갖춰져 있지 않은 셈이다. 참여연대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나름대로 몸집이 있는 견실한 시민·사회단체가 정책 생산 역할을 일정 부분 수행하고 있지만 이들을 순수한 싱크탱크로 보기는 어렵다.
기본적으로 싱크탱크는 국내·국제 문제를 연구·분석하고 관련 정책을 생산하는 집단을 말한다. 상근하는 전임 연구원이 스스로 새로운 연구 결과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이와 달리 시민단체는 네트워크 형식으로 외부 전문가 집단의 도움을 받아 정책 대안을 마련하고 있다. 법안 통과를 요구하며 국회 앞에서 시위하는 일이 없다는 점도 싱크탱크가 시민단체와 다른 대목이다.
일부 연구소 관계자들은 지금 존재하는 대안 연구소들에 대해서도 ‘싱크탱크’라고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라고 말한다. 자산 규모가 워낙 작은 데다 양질의 연구인력을 충분히 보유한 곳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미국에는 정부나 기업 후원금 외에도 싱크탱크를 금전적으로 지원하는 기금과 재단들이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2006년 문을 연 독립 민간연구소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새사연)’은 뜻있는 회원들 덕분에 비교적 안정적으로 자금을 조달하고 있는 곳이다. 회원들이 소득의 10분의 1을 후원금으로 내는 ‘십일조’ 방식이다. 넉넉하지는 않아도 연구의 독립성을 보장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이 돈으로 직원 11명이 지금까지 6~7권의 연구 단행본을 냈고 올해 초엔 국책·기업연구소만 내놓는다던 경제전망 보고서를 발표했다. 연구소 운영이 일정한 궤도에 오른 모양새다.
그러나 유능한 전임 연구원을 구하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특히 양극화 심화와 비정규직 증가, 정부의 민영화 추진 등 현안이 산적한 경제분야에서 진보적 사고를 가진 연구자를 찾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다. 김병권 새사연 연구센터장은 “기존에 배출된 경제 전공자들은 보수적 성향이 강해 인력 풀이 거의 없다”면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거나 논문을 쓰고 있는 소장 연구자들과 함께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말했다.
연구소 측이 원하는 인재상을 발견했다고 해도 그 연구원이 장기 근속한다는 보장이 없다. 연구자의 최종 목적지는 대학이라는 사고방식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기실 한국 사회에서 대학 이름이 부여하는 권위를 마다하기란 쉽지 않다. 대학 교수나 정부 관료로 지내다 싱크탱크로 자리를 옮기는 일이 흔한 미국과는 문화가 다르다.
연구원을 채워넣기도 급급한데 ‘로비스트’까지 별도로 가동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미국 싱크탱크처럼 보고서를 들고 의회의원이나 고위 공무원을 찾아다니면서 설득하는 것은 영세한 연구소 입장에서 꿈도 못 꿀 일이다.
앞다퉈 문여는 산별노조 연구소
미국의 싱크탱크를 연구하고 있는 홍일표 ‘희망제작소’ 선임연구원은 정책 경쟁의 문화가 일천하다는 점도 대안 연구소들이 성장하지 못한 배경이라고 설명한다. 정책 중심의 정치를 하자고 말은 하지만, 정책을 놓고 보수와 개혁 진영이 제대로 갑론을박한 경험이 있느냐는 것이다. 홍 연구원은 “그간 언론과 시민사회는 강력한 논평과 성명이 필요했을 뿐, 그 이상의 촘촘한 정책 보고서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쪽에서 보고서가 나오면 다른 쪽에서 카운터 보고서가 나오는 등 서로 마주보고 토론하는 장이 형성되는 게 우선”이라며 “좋은 보고서를 낼 수 있는 연구소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차라리 부차적인 것”이라고 지적했다.
인력·재원이 부족하고 보고서를 무기삼아 싸워본 경험도 없으니, 대안 연구소의 결과물이 국책·기업 연구소만큼 세련되지 못하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해당 보고서가 정책 입안자들의 눈에 들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심상정 전 민주노동당 의원실에서 수석보좌관을 지냈던 손낙구 전 민노당 대변인은 “실현 가능성이 있는 정책 대안을 손에 잡히는 수준으로 쥐어 줘야 쓸모가 있는데 (소규모 연구소들의 보고서는) 이런 부분에서 많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당시 ‘경제개혁연대’나 ‘투기자본감시센터’, 경실련 등에서 많은 도움을 받긴 했지만 “정치 일선에서 쓸 만한 보고서는 아직 부족한 게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가장 유력한 타개책으로 주목받는 게 산별노동조합의 부설 연구소다. 진보·개혁 진영에서 노조만큼 자금 동원력을 갖춘 조직이 드물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자금이 있으니 단 몇 명의 연구원이라도 전임으로 기용할 수 있어 연구 활동의 지속성이 보장된다.
실제로 요즘 산별노조들 사이에선 부설 연구소 설립 붐이 일고 있다. 민주노총처럼 다양한 이해당사자가 결합해 있는 대단위 상급 노조와 달리, 각자 ‘전공’ 분야에 집중할 수 있어 연구효율이 높다.
산별노조 부설 연구소 1호로 꼽히는 ‘금융경제연구소’는 노조 연구소의 모범 사례로 평가된다. 2004년 한국노총 산하 금융노조가 출자해 설립했다. 조혜경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에 따르면 연구 독립성이 보장된다는 게 이 곳의 장점이다. “연구소가 노조 예산을 받아서 쓰고 있지만 노조의 입김이 연구에 관철될 여지는 없다.” 이런 구조를 바탕으로 연구소는 ‘금융 공공성’이라는 의제를 새롭게 제시했고, 외환은행과 론스타 문제를 알리는 데도 한몫 했다.
가장 최근에 등장한 곳은 지난달 20일 개소한 ‘사회공공연구소’다. 민주노총 산하 전국공공서비스노조가 출자 주체다. 시장만능주의가 사회적 공공성을 침식하고 있는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 공공기관과 공공재정, 사회정책과 복지 등의 분야에서 대안을 개발한다는 게 목표다. 노조가 커서 연구소도 비교적 규모가 있다.
이 연구소의 나상윤 연구기획실장은 “연구 결과를 정부 정책에 반영하는 게 당분간은 쉽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노조라는 물적 토대가 우리의 정책 제안을 사회적 의제로 만드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연구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소장과 이사장을 모두 외부 인사로 채웠고 재단법인으로 독립하는 방안도 고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밖에도 민주노총 산하 전국사무금융연맹이 산업정책연구소, 투기자본감시센터 등과 함께 ‘진보금융네트워크(준)’라는 형식으로 연구소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5월에는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가 정책연구원을 개소했다.
하지만 이들 연구소의 정책 대안을 적극 검토·채택하고, 이들 연구소를 키워줄 수 있는 정당이 없는 한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헤리티지와 브루킹스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각각 공화당과 민주당이라는 ‘기댈 언덕’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혜경 연구위원은 “현재 비슷비슷한 문제를 고민하는 소규모 연구소들이 우후죽순 분산돼 있는 상황”이라며 “이들을 하나로 묶어내려는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작은 연구소들이 각개약진해서 하나의 거대한 싱크탱크로 모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제대로 된 진보·개혁 정당이 외곽에서 받쳐줄 때 새로운 형태로 판세가 짜일 수 있지 않겠느냐”고 전망했다.
<최희진기자 dai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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