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시행 따른 예산 준비했어야 … ‘사회임금’ 확대 절실
‘비정규직 문제의 근본적인 것이 고용의 유연성’(연합뉴스 2일자)이라니, 한마디로 난센스다. 이명박 대통령이 민관합동회의에서 한 이 언급은 억지다. 비정규직 사태와 관련 “국회가 적절한 기간을 정해 종합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은 지당한 얘기다. 하지만 비정규직 보호법 핵심을 고용유연성으로 꼽는 것은 사실과도 너무 다를 뿐만 아니라, 근본대책을 찾지 못하게 하는 설명이다.
비정규직은 ‘외환위기의 저주’였다. 치열한 세계적 경제경쟁과 심화된 사회양극화의 중심엔 비정규직이 있었다. 2002년 384만명(임금근로자의 27.4%)이던 비정규직은 2007년 570만명(35.9%)로 늘었다. 1998년 이후 기업 구조조정이 늘면서 기간제나 용역뿐만 아니라 제조업 사내하청, 서비스 파견, 청소용역, 특수근로형태, 공공부문 위탁 등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고용형태가 도입됐다.
양극화 심화는 내수 침체와 사회갈등을 불러왔고, 정부는 비정규직 고용을 법으로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1999년부터 논의된 비정규직법은 2006년말 입법되기까지 노사정위원회에서 2001년 7월부터 무려 100차례나 토론을 거쳤고, 법안이 상정된 2004년 11월부터는 26회나 국회토론이 열렸다. 그만큼 이해관계가 격렬하게 부딪혔다는 얘기다.
◆비정규직은 외환위기의 저주 = 한국사회는 비정규직 문제에 관한 한 ‘참, 못된 구조’다.
우선 기업과 정규직근로자가 비정규직의 수혜자다. 기업은 비정규직을 재물로 성장을 누렸다. 인건비 절감과 자유로운 사업조정 기회를 얻었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방패삼아 고용안정을 유지해왔다. 점거농성중인 쌍용차 조합원들이 지난 3월 1차 구조조정 위기를 앞뒀을 때 자신을 대신해 먼저 ‘짤려준’ 이들은 사내하청 350명이었다. 남은 200명도 정규직을 대신해 일자리를 잃었다. 여론도 정규직들도 그들의 해고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치권의 제안으로 이뤄진 ‘비정규직 사용기간 제한 적용 유예 논의를 위한 5인 연석회의’는 노동문제의 첫 정치 교섭이었다는 점, 양노총이 함께 참여했다는 점 등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비정규직 문제의 당사자가 빠져 ‘힘 있는 자들의 정치 타협’라는 비판도 있다. 비정규직 사태의 직접 이해관계자는 비정규직 자신과 이들을 고용하고 고용보험료를 내는 기업인데, 이를 배제한 합의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정치권과 노동계를 싸잡아 비난한 정부도 사실 목소리를 높일 입장이 못 된다.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4년으로 연장하자고 한 정부안이 국회에 제출됐다고 하더라도 여당안보다 쉽게 개정절차를 밟았을 리 만무하다. 비정규직보호법의 입법취지인 차별시정과 남용방지 노력도 충분하지 않았다. 노동부는 차별시정 신청은 비정규직 자신만이 할 수 있고, 노조는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신청권을 주지 않았다. 비정규직법 제정 당시 정부가 고용안정 종합대책으로 제시한 방안은 여전히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비정규직 임금격차를 줄이고 사회보험가입률을 높이겠다고 했다. 하지만 비정규직의 정규직 대비 시간당 임금은 2007년 3월 52.4%에서 2009년 3월 49.7%로 낮아졌다. 사회보험 가입률도 고용보험의 경우 같은 기간 33.3%에서 35.7%로 불과 2.4%만 올랐다. 자발적인 시간제근로를 활성화하기 위해 ‘시간제근로 청구권 제도 지원’ 계획은 아직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입법 취지 못살린 정부 = 비정규직 문제는 법보다 예산에 있다.
정치권이 사용기간 법 조항만을 주물러 해결될 수 없다. 현실적으로 인건비 지불 여력이 낮은 중소영세기업들은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못할 경우 일터에서 내보내거나 사실상 법을 위반하는 수밖에 없다.
필요한 예산은 100인미만 사업장에 2년간 드는 사회보험료(첫해 33만명, 둘째해 10명 대상) 감면만 따져도 1조8300원 정도의 예산이 필요하다. 야당은 3년간 3조6000억원의 예산이 투입돼야 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비정규직법을 만든 민주당도 예산문제의 책임에선 자유로울 수 없다. 2006년 입법 당시 법만 만들었지 예산대책은 전혀 세워두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올해 관련 예산계획에 대한 노사정 합의와, 정기국회에서의 예산 확보 준비기간이 필요하다.
이 대통령 요구한 비정규직 문제의 근본대책은 사회임금의 확대다. 정규직 노조가 구조조정에 격렬하게 저항하는 이유는 사회임금이 턱없이 낮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와 사회공공연구소 오건호 박사에 따르면 한국 가계운영비 중 사회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7.9%에 머물러 OECD 평균 31.9%와 크게 차이난다. 영국은 25.5%, 일본은 30.5%, 프랑스는 44.2%다. 기업에서 얻는 시장임금과 대비되는 ‘사회임금’은 사회안전망(4대보험과 기초생활보장제)보다 포괄적인 개념으로 노후·장애지원, 공공임대주택까지 포함한 사회복지지출 수준을 의미한다. 오 박사는 “사회임금이 낮으니 실제로 노동자들에게 해고는 곧 죽음”이라고 했다. 한국노총 비정규연대회의 이상원 의장은 “결국 국가 재원을 비정규직을 위해 얼마나 쓰느냐가 문제”라고 말했다.
강경흠 기자 khk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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