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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6월22일 저녁,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가 열린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부모와 함께 나온 한 어린이가 촛불을 손에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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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기획 참여연대·참여사회연구소, 사진 <한겨레> 사진부/한겨레출판·1만3000원
시민운동가·사회학자 등의 글에 ‘한겨레’ 현장사진 담은 비망록
‘연대와 공공성의 발견’ 성과 폭력-비폭력 화두는 집단지성 숙제
2008년 7월5일 서울광장을 메운 수십만의 촛불은 ‘국민 승리의 날’을 선언했다. 그러나 설익은 열광이 테르미도르의 공포로 전환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뒤따른 것은 지도부 검거 선풍과 집단소송, 촛불시민에 대한 비열한 낙인찍기였다. 법질서 확립을 명분 삼아 공권력이 전면화했고, 정보 기관을 강화하고 미디어를 장악하려는 집권세력의 움직임은 한층 속도를 냈다. 도심의 아스팔트 위에 거대한 점묘화로 그려낸 ‘미래의 공화국’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은 한여름 밤의 꿈에 불과했던 것일까.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는 분노와 환희, 절망과 희망이 교차했던 2008년 여름에 관한 비망록이다. 시민단체 활동가와 사회학자, 법률가, 문학평론가, 에세이스트의 시선에 포착된 촛불의 양상과 의미가 <한겨레>의 현장사진과 어우러져 한 편의 영상실록으로 태어났다. 글쓴이들은 섣불리 촛불의 승패를 가늠하려 하지 않는다. 손에 쥔 성과는 미약할지언정, 시민들이 일궈낸 민주주의와 공동체의 체험은 각자의 의식 안에 ‘사회적 기억’으로 자리잡아 언제든 새로운 촛불의 동력으로 전환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책의 제목이기도 한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성경 구절은, 궁극의 승리를 향한 의지와 낙관이 담긴, 촛불의 자기실현적 예언인 셈이다. 박영선 참여연대 기획위원장은 말한다.
“촛불은 확연히 새로운 저항의 주체를 탄생시켰다. 더불어 한국 사회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성찰에 뒤이은 창조적 저항, 그리고 대안의 물꼬를 트는 행보를 시작했다.”
이 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발생적 기원에서 소멸에 이르는 촛불집회의 연대기적 전개과정을 국면별로 정리했다는 점이다. 10개로 매듭화된 각각의 국면에는 ‘전조’·‘폭발’·‘진화’·‘역진’처럼 정세적 특징을 집약한 표제어가 붙어 있다. 전형적인 정세 분석의 형식이지만, 정치공학적 엄밀성에 기대기보다 체험과 공감에 바탕을 둔 ‘이해적 서술’에 충실하다.
글쓴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대규모 촛불시위를 촉발한 에너지가, 정부와 보수언론, 그리고 대다수 국민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광우병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인수위 시절의 영어몰입교육과 강부자 내각 파동, 출범 초기 각종 규제완화 조처와 학교자율화, 대운하 논란 등을 거치며 누적된 시민사회의 불만이, 미국산 쇠고기 협상이라는 ‘스파크’를 만나면서 ‘주류 시스템이 가하는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 폭발했다는 게 이들의 분석이다.
5월 말 이후 촛불의 주력부대로 등장하는 386세대에겐 또 하나의 동력이 추가된다. ‘부끄러움’이다. “10대 소녀들의 촛불이 386 기성세대들을 부끄럽게 만들었고, 그 부끄러움으로 새로운 촛불을 들게 했다.”(박영선) 이 부끄러움의 근원을 윤형근 한살림 상무는 “성장 욕망으로 꿈틀거리는 ‘우리 안의 속물성’에 대한 성찰”에서 찾는다.
문화제가 거리시위로 전환되던 5월 하순 정부와 공안당국이 유포했던 ‘운동권 배후설’ 또한 여지없이 논박된다.
“형식도 틀도 각본도 없는 우왕좌왕형 데모의 극치였다. 이 가열차지도 치열하지도 않은 촛불시위대는 정해진 틀을 완전 무시했다. 경찰도 시위대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현장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되고 송’ 분위기였다.”(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이들이 증언하는 촛불의 최대 성과는 ‘연대와 공공성의 발견’이다. 수백만의 시민이 “주권자로서 분명한 자의식을 갖고 그토록 오랜 기간 거대한 하나를 이룬 것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처음”(신진욱 중앙대 교수)이었고, “시장원리를 철칙으로 배워온 구성원들이 (교육·의료·물·공영방송·공기업 등) 공공성의 차원으로 의제를 넓혀간 것 역시 한국 현대사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오건호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이 성취한 위대한 발견도 촛불에 내장된 두 개의 난제들과 조우했을 때, 교착된 전선을 뚫고 나갈 힘이 되어주진 못했다. 그것은 ‘폭력과 비폭력’ ‘정당성과 합법성’의 딜레마였다. 6월10일 이른바 ‘명박산성’ 앞에서 벌어진 ‘월담 논쟁’은 시민들의 ‘집단지성’으로도 풀지 못한 ‘고르디우스의 매듭’이었다.
“컨테이너를 넘어서고자 하는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드는 것만으로는 변화를 이뤄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반면 광장에 머무르고자 했던 사람들은 비폭력 노선의 견지가 촛불의 정당성을 지켜주며, 컨테이너를 넘어선다고 어떤 실질적 변화가 이뤄질 수 없다고 판단했다. 새로운 촛불이 켜질 때까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과제로 남았다.”(이남주 성공회대 교수)
물론 ‘폭력적이지 않지만 공세적이고 과격한’ 직접행동으로 매듭을 끊을 수 있다고 믿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6월 29일 비폭력 직접행동의 교범에 충실했던 와이엠시에이 ‘눕자 행동단’이 무자비한 유혈진압의 제단에 자신들을 내놓았음에도, 촛불과 공권력의 행동 패턴엔 주목할 만한 변화가 없었다. 2009년 다시 타오를 시민들의 촛불 안에는 이 매듭을 풀어낼 현자의 지혜가 담겨 있을까.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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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컷 찍고 또 찍고… 1천장에 1장꼴로 사진 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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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만컷 찍고 또 찍고… 1천장에 1장꼴로 사진 골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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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만 해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언어가 사진이다. 감동을 주는 사진은 예외 없이 문자와 음성으로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와 깊이를 담고 있다. 그 사진은 보는 이의 망막과 심장을 찔러 먹먹하고 저릿한 통증을 가져다 준다.
뛰어난 기록사진의 비밀은 사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를 움직이는 힘에 있다고 사진기자들은 말한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에 실린 115컷의 사진이 이를 증거한다. <한겨레> 사진기자들은 2008년 5월부터 석 달 남짓 더위와 허기와 잠과 싸우고, 물대포와 방패와 곤봉 세례를 견뎌가며 촛불의 현장을 지켰다. 그 안에서 기자들은 10만컷 넘게 사진 찍고, 1000장에 1장꼴로 ‘작품’을 골라냈다.
6~7개월의 시간적 거리를 뛰어넘어 다가오는 시각적 울림들은, 보는 이를 압도하는 광대한 스케일의 와이드컷에선 좀체 찾아볼 수 없다. 감동적 사진들은 대체로 자신의 감정과 의지를 작은 표정과 몸짓 하나에 외화시킨 우리의 이웃들에 관한 것들이다. 이를테면 8월15일 강제연행이 시작된 명동 거리에서 형광 색소를 뒤집어쓴 채 어깨를 겯고 경찰들을 노려보는 20대 청년들의 결연함. 이 사진에는 곤봉을 치켜든 공수부대원 앞에서 ‘때리는 대로 맞겠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고 땅바닥을 응시하던 피투성이 광주 청년의 28년 전 모습이 자연스레 겹쳐진다.
이 사진들은 또 어떤가. ‘함께 살자 대한민국’이란 문구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환하게 미소짓는 촛불소녀, 장대비 내리는 서울광장에서 흐트러짐 없이 촛불을 들고 선 ‘우비 시민들’, 촛불문화제에 참가했던 30대 직장인이 차량 끊긴 광화문 네거리에서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는 모습, 거리행진을 하다 지나가던 버스 안 승객을 향해 손팻말을 흔들며 동참을 호소하는 50대 시민, 인천에서 상경한 9명의 여고생들이 한 장에 한 글자씩 새겨넣어 만든 “우리가 무섭지 않은가”라는 문구의 손팻말. 한컷 한컷이 지난여름 우리를 떨고, 울고, 웃게 했던 격정의 순간들로 안내하는 기억의 회로판이다.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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